◈우리나라 100년전 아름다운 고적들◈
고적(古跡)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2층 건물.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다.
아래가 넓은 데 비해 2층은 좁은 형태이다.
정면에 ‘수어장대’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수원 화서문(華西門)
수원 화성의 서문으로 보물 제403호.
단층 누각에 옹성을 쌓았다.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화성은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이
통행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화서문은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다.
수원 화홍문(華虹門)
수원 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북수문(北水門)이라고도 불렀다.
7개의 석조 무지개로 수문을 만들고
수문 돌다리 위에 다시 처마 곡선이
유연한 문을 만들었다.
왼편 뒤쪽으로 장안문이 보인다.
주변의 자연풍광이 아름답다.
수원 전경
멀리 화성이 보이는 수원의 모습.
동생을 업은 아이 앞으로
물이 마른 내와 다리가 보인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섞여 있다.
수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왼쪽이 화홍문이고
오른쪽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가 방화수류정이다.
이 정자에 오르면 주변을 두루 살피고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소를 매어두고 한가롭게 쉬는 농부와
주변 경관이 썩 잘 어울린다.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군 안녕리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의 합장릉.
홍살문 뒤에 제례를 치르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에는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인
현륭원(顯隆園 ; 현재의 융릉) 동쪽에 능을 만들었지만
훗날 왕후와 합장하며 서쪽으로 옮겨 건릉이 되었다.
화성장대(華城將臺)
성벽 정상에 있어 안팎을 두루 살피며
군사를 지휘하던 2층 문루다.
정조가 쓴 ‘화성장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화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장대(西將臺)라고도 불렀다.
화녕전(華寧殿)
정조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는 전각.
부왕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든 것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순조가 세웠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 옆에 있는 돈대(墩臺)다.
공심돈이란 속이 빈 돈대라는 뜻.
내부는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둥근 벽을 따라 계단이 놓여 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화성에는 모두 세 곳에 공심돈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원의 서호(西湖)
화성의 서쪽에는 농업용 관개시설로 만든
인공호수 축만제(祝萬堤)가 있다.
서호라고도 하며 정조 때 축조됐다.
항미정(杭尾亭)이라는 정자가 이곳의 경관과
풍치를 돋보이게 했는데,
사진은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 풍경이다.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1906년 일제 통감부가
일본 농법의 한국 이식을 목적으로
수원에 세운 기관이 권업모범장이다.
한국 농업의 시험·조사보다는
일본 농법의 지도·권장에 치중했다.
방화수류정과 용연(龍淵)
방화수류정은 용두암(龍頭岩) 위에 세워졌으며
아래에 있는 연못은 용연이라 불렀다.
용연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수원 성곽
주변에서 가장 경관이 좋았다.
못가에는 돌로 만든 용두가 자리잡고 있었다.
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에 있는 절.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관리하기 위해세운 능사(陵寺)다.
정조가 김홍도(金弘道)에게 그리게 해
목판으로 만든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보관되어 있다.
수원 남제(南堤)의 버드나무길
남제는 수원 남쪽에 있는 저수지로
순조대에 축조되었다.
이 곳의 긴 버드나무길은 남제장류(南堤長柳)라 하여
수원8경 가운데 하나였다.
소에 물건을 싣고 지나던 장정이 사진에 담겼다.
우산을 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천항과 시가
인천은 1883년 1월 개항했다.
서울의 관문인 만큼 일찍부터
도시가 발전하여 시가를 형성했다.
사진은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내려다본 인천항.
인천 일본인 거리
인천의 중심가. 일본식 4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서양식 3층 건물도 보인다.
한복을 입은 한국인이
일본인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인천의 일본인 거주지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는 일본인이 모여 사는
조계(租界)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자유공원 남쪽이다.
사진은 일본인 거류자가 급증하면서 형성된
주택가. 곳곳에 전신주가 서있다.
인천 부두
배에 실을 물건과 부린 물건이 즐비하게 쌓여있다.
인천 일본영사관
인천이 개항되자마자
일본은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의 영사관을 준공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영사관을 이사청으로 개편해 청사로 사용했다.
1 910년 이후에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인천 중구청 자리이다.
북한산 중흥사(重興寺) 대웅전
중흥사는 숙종대에 북한산성이 축성된 뒤
산성을 지키는 승군(僧軍)을
관장하며 큰 사찰이 되었으나,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했다.
지금은 주춧돌과 축대만이 남아 있다.
파주 용미리 쌍미륵
경기도 파주 광탄면 용미리 용암사에 있는 마애입상.
보물 제93호. 고려 초기 석불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 들어 조선 세조 11년(1465)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조각한 것이다.
개성 관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조선시대에
개성부가 되어 유수(留守)가 파견되었다.
1906년 개성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930년 다시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문루는 이층으로 위층엔 마루를,
아래층엔 4각으로 다듬은 돌기둥을 놓았다.
개성 서대문
원 사진첩에는 이 사진에 ‘개성 서대문’이라는
간단한 설명만이 붙어 있다.
오른쪽 큰 나무 아래 있는 정자는 길 가던 이들이
잠시 쉬어가는 자리였을 것이다.
개성 인삼밭
개성은 인삼재배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산삼이 수요에 비해 크게 모자라자
인삼재배가 시작됐는데,
조선 후기부터 개성이 대표적인 재배지로 떠올랐다.
이 때문에 개성상인은 인삼교역으로 유명했다.
개성 관음사 대웅전
개성 천마산 기슭에 있는 관음사의 대웅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관음사는
주변 경치가 빼어나‘개성금강’이라고도 불렸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고,
앞에 높이 4.5m의 7층석탑이 있다.
개성 선죽교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된 곳으로 알려진
개성의 돌다리. 앞에 보이는
비각에는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 다리 옆 시내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은진미륵(恩津彌勒)
논산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미륵보살상.
보물 제218호. 머리 부분이 커서
높이가 18.2m나 되는 고려시대 최대의 석불입상으로,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공주 공산성(公山城) 쌍수정(雙樹亭)에서
인조는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쌍수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공주 진남루(鎭南樓)
공산성의 남문.
두 석축기단에 걸쳐 누각을 세워
충주 충렬사(忠烈祠) 임경업어제비(林慶業御製碑)
충주 충렬사에 배향된
정조의 어제비.
고려 무신 최영(崔瑩)과 함께 무속신앙에서
충주 약사(藥寺)의 약사전과 삼층석탑
약사는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단호사(丹湖寺)의 옛 이름.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되었다.
약사전 내에는 고려시대 철불좌상(보물 제512호)이
앞뜰의 3층석탑과 깊게 휜 소나무가
충주 관아 비석
조선시대 관아 근처에는
대개는 수령들의 치적과 무관하게 만들어지곤 했다고 한다.
희미한 글귀로 보아 어느 현감의
폭포
충주와 제천 사이의 어느 산속에 있는 폭포인 듯한데,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길이 없다.
물줄기가 용의 모습을 닮았다.
충주 육각당(六角亭)
연꽃이 만발한 연못 한가운데 있는
현재 육각정과 연못은 없어지고
대구 거리
상점들이 즐비한 대구의 거리.
대구 달성공원(達成公園)
달성은 본래 삼국시대의 성곽인데,
도로를 만들어 공원으로 사용했다.
세웠다고 하는데, 사진에 보이는 것이
부산 일본인 거리
부산의 일본인 거리.
부산항
부산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로 개항장이 되었다.
일제는 1905년 전후 경부선 철도 개통과 관부연락선
취항, 부산항 축항(築港)공사 등 일련의 사업을 통해
부산을 한국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사진은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는
아미산에서 내려다 본 부산항.
부산 초량
부산 용두산 아래 초량은 숙종대부터
왜관(倭館)이 있던 곳.
개항 이후 이곳은 일본인 거류지가 되었다.
부산항 매립지
부산은 연안의 땅이 몹시 좁았기 때문에
새로운 땅을 만들기 위해
1902년 개펄 매립공사를 시작했다.
매립지에 부산역 부지가 만들어지고
부두지역이 확대되어 세관과 제1부두가 완성됐다.
부산항 잔교(棧橋)
1905년 관부연락선이 취항하자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에 일제는 1906년 항만에 철도잔교를 놓아
사진은 관부연락선에서 내려 잔교를 건너는 일본인들.
부산세관
부산이 무역항이 되면서 관세수입이 증가하자
부산세관으로 이름이 바뀐 1906년 무렵 일본인들은
세관을 새로 지었다.
사진은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나르는 장면으로 보인다.
부산 일본군수비대
1895년 일본군이 부산에 주둔했지만,
이 무렵 한국군은 본래 있던 군진과
수영마저 폐지되고 진위대(鎭衛隊)도 파견되지 않았다.
북쪽 기슭에 병사를 짓고 주둔하다가
목포이사청과 우편국
목포는 1897년 개항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일본 기관들이 들어섰고
군산 전경
1899년 개항한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미곡반출의 관문이었던 것.
목포 시가
바다가 보이는 목포 시가지.
함흥 남대문
함흥성의 정문으로 남화문(南華門)이라고도
왼쪽에 보이는 종각의 범종은 현종 때
오가는 사람이 많고
함흥 만세교(萬歲橋)
성천강을 가로지른 나무다리로,
뜻에서 조선 태조가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일본군이 1908년 다시 세웠으나,
정월대보름에는 이곳에서 다리밟기 놀이를 했다.
함흥 향교
조선 초기에 현유(賢儒) 배향과
유생들이 모여 있는 누각이 제월루(霽月樓)다. 대성전과
함흥의 한국인 마을
함흥 어딘가에 있었을 한국인 마을.
물건을 이고 가는 아낙, 아이들,
함흥 동문 밖 귀주사(歸州寺)
고려 때 창건된 귀주사는
대웅전 앞에서 일본인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함흥 남문 밖 거리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 한가운데
분위기로 봐서는 장터인 듯하다.
옆으로 더벅머리 청년이 지나간다.
회령 시가지
회령은 함경북도 국경지역으로
두만강 연안의 이 도시는
회령 시가지에 소달구지들이 분주히 오간다.
전선줄이 하늘을 가른다.
회령 동문 안 거리
회령 동문 어귀의 풍경. 쉬고 있는
성을 나서는 아낙의 모습이 마냥 평화롭다.
회령우편국
회령에 설치돼 있던 우편국 전경
회령 현충사비(顯忠祠碑)
회령읍내의 현충사에 있는 비.
기려 세운 것으로, 높이 182㎝, 너비 60㎝
배로 두만강을 건너는 풍경
두만강을 건너면 간도(間島)다.
훈춘(琿春) 시가
훈춘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현의 중심지로,
920년 이른바 ‘훈춘 사건’이 일어나
옌지(延吉) 국자가(局子街)
중국 지린성의 옌지에도 한국인이 많이 살았다.
국자가는 옌지의 중심지인데,
안둥현(安東縣) 부두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도시로 지금의 단둥(丹東).
한국인들이 만주나 중국으로 나가기 위해
사진은 안둥 부두에 정박한 한국 사람들의 목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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