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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쇼팽 - "빗방울" 전주곡 작품번호 28 -15 D-flat major ★

채픒린 2018. 5. 3. 20:16

                                                      


 쇼팽, "빗방울"전주곡 작품번호 28 - 15 내림 라장조 

 Chopin, Prelude in D-flat major, Op.28 No.15 ("Raindrop") 

                          

Composed by Frederic Francois Chopin (Polish, 1810.3.1 ~ 1849.10.17)

Painted by Franz Xaver Winterhalter (German, 1805.4.20 ~ 1873.7.8)

Performed by Valentina Igoshina (Russian, born 4 November 1978)

                       

                                   

   Chopin - Prelude in D-flat major, Op.28 No.15 ("Raindrop")                            

   (쇼팽 : "빗방울"전주곡 작품번호 28 - 15 내림 라장조)  2017.01.13 01:01 朴泳柱 作  

 빗소리 속 우울한 마음으로 조르주 상드를 생각하며 작곡  

              

      1836년 쇼팽은 마리 다구 백작부인(프란츠 리스트의 연인)이 연 한 파티에서 여류소설가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상드는 쇼팽보다 6살 연상이었고 아이 둘이 있었다. 상드는 쇼팽을

            모성애적인 애정으로 돌보았다. 당시 쇼팽은 폐결핵이 깊었고 상드도 관절염을 앓고 있어서 추운

            파리의 겨울을 피해 따뜻한 곳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그래서 간 곳이 스페인령 지중해의 섬

            마요르카이다.그런데 막상 1838년 11월 초에 섬에 도착해보니 기대와는 달리 날씨가 좋지 않았다.

            숙소도 마땅한 곳이 없어 폐허가 된 발데모사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내게 되었다.

            악천후로 급기야 쇼팽은 각혈까지 하게 되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은 관계였으므로

            가톨릭 신자인 주민들은 눈을 흘기고 수군댔다. 또, 파리에서 쇼팽의 피아노를 가지고 오는데

            세관에 묶이는 바람에 피아노를 찾게 된 것은 섬에 도착한 지 5주나 지나서였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여러 가지로 우울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상드와 두 아이들이 외출하고 쇼팽이 숙소에

            남아 있을 때 마침 비가 왔다. 쇼팽은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상드를 생각하며 이 곡을

            지었다고 한다. 마요르카 섬에는 1839년 2월 중순까지 머무르다 결국 나쁜 날씨로 쇼팽의 건강이

            더 악화되자 그들은 스페인으로 건너가 요양을 하게 된다. 그때 힘들게 찾은 피아노도 팔아버릴

            정도였으니 그들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마요르카에서의 나날은 힘들었지만 쇼팽의 많은

            곡들이 여기서 작곡되어, 이때가 쇼팽의 작곡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빗방울 전주곡’뿐 아니라 24개 전주곡의 나머지 곡들도 대부분 마요르카에서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쇼팽의 ‘전주곡’은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녹음하고 싶어 하는 명곡이다.       

                          YTN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 프랑스어 : 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가장 위대한 폴란드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호핀(폴란드어 : Fryderyk Franciszek Chopin)이다.

            (폴란드어 권에서도 프랑스 발음에 맞추어 성을 ‘쇼펜(Szopen)’이라 부르기도 함)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ère Lachaise에 안장되었고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십자가 교회에 있는 기념비에 묻혔다.

                         Filme completo Chopin               

                       무덤이 둘인 쇼팽                                                                                                                      

                        ● 파리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                    


            파리에서 3번 지하철을 타고 강베타라는 역에서 내리면 돌담으로 둘러싸인 숲이 나온다.

            이곳 이 바로 파리의 명물인 페르 라세즈(Père Lachaise) 공동묘지다. 공동묘지를 보기 위해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은 아마 세계에서 페르 라세즈 뿐 일 것이다.

            작곡가 비제와 가수 에디트 피아프, 화가 들라크루아와 피사로, 소설가 발자크와 위고,

            배우 이브 몽탕과 시몬 시뇨레 등 왕년의 프랑스 예술인들뿐만 아니라, 오스카 와일드, 쇼팽,

            마리아 칼라스, 로시니, 이사도라 덩컨, 그리고 미국의 팝 가수 짐 모리슨 등 프랑스인이 아닌

            수많은 저명인사들도 페르 라세즈에 잠들어 있다. 39세에 세상을 떠난 쇼팽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장례식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유해는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심장만은

            폴란드 바르샤바 교외 크라쿠프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 되었다.

            ●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남쪽 크라쿠프 교외에 있는 성 십자가 성당은 1655년 스웨덴의 침공으로

            파괴된 것을 1679~1696년에 다시 지었다. 금과 은을 많이 사용해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성 십자가 성당은 이 지역 출신 쇼팽의 심장이 묻혀 더 유명해진 곳으로,

            심장은 본당 중앙의 왼쪽 돌기둥 아래 묻혀 있다. 쇼팽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히고, 쇼팽의 여동생이 파리를 방문해 겨우 심장만을 가지고 돌아와 이 교회에

            안치했다고 한다.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의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으로 쇼팽의 이름이 쓰인

            커다란 기둥을 볼 수 있는데, 그 기둥 아래에 묻혀 있다. 지금도 쇼팽의 심장이 묻힌 돌기둥은

            언제나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년 7월 1일 ~ 1876년 6월 7일)는 자유분방한 연애로도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이다. 본명은 오로르 뒤팽(Aurore Dupin)이다.


                        쇼팽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여성 작가 조르주 상드(1804~1876).쇼팽보다 6년 연상.

                        그녀의 본명은 ‘아망틴 오로르 루실 뒤팽’(Amantine Aurore Lucile Dupin)입니다.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여섯 살에 지방 귀족이었던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지만 시골 영주의 안주인으로 살 수 있는 여성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뒤드방 남작과 헤어진 채 두 아이를 데리고 파리로 들어서지요. 그게 1831년의 일이었고 이듬해에

                        <앵디아나>(Indiana)라는 소설을 써서 작가로 데뷔합니다. ‘조르주 상드’라는 이름은 이 소설을

                        발표하면서 사용한 필명이었는데 이후에도 계속 같은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한데 ‘조르주’는 남자 이름이지요. 영어로 하면 ‘조지’가 됩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여성작가들이 남자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생애]

                        파리에서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 프랑스의 베리주 노앙에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루소를 좋아하는 고독한 소녀 시절을 보냈다. 16세 때 지방의 귀족인 뒤드방 남작과 결혼하였으나

                        행복한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고, 1831년 두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와 파리로 옮겼다.

                        1832년 친구의 권유로 신문소설 《앵디아나》를 써서 일약 유명해지면서부터 남장 차림의

                        여인으로 문인들 사이에 끼어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자유분방한 생활은 남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시인 뮈세와 음악가 쇼팽과의 모성적인 연애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상드는 이처럼 72년의 생애 동안 우정과 사랑을 나눈 사람들이 2000명이 넘는 신비와 전설의

                        여인이었으며 정열의 화신이었고 ‘사랑의 여신’이었다. 그의 일생은 모성애와 우애와 연애로 일관된

                        자유분망한 생애로서 그야말로 낭만파의 대표적 작가다운 모습을 보여 주여주고 있으며, 선각적인

                        여성해방운동의 투사로서도 재평가되고 있다.

                        [문학 활동]

                        그녀는 뮈세쇼팽 등의 예술을 사랑하였으며, 2월 혁명 때에는 크게 활약하였다.

                        그녀의 문학 활동은 크게 4기로 나누는데, 자서전적인 작품을 쓴 제1기에는<앵디아나><발렌티>

                        <렐리아> 등이 있으며, 인도주의와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쓴 제2기에는 <프랑스 여행의 길동무>

                        <안지보의 방앗간지기> 등이 있다. 제3기는 전원 소설인 <마의 늪> <사랑의 요정> 등이 있고

                         제4기는 동화와 희곡을 쓴 안정된 말년의 시대로서 <빌르메르 후작>과 그의 최고 걸작인

                         <내 생활의 역사>가 있다. 그녀의 작품에는 인도적인 이상주의와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이 넘쳐

                         있으며 스탈 부인과 함께 유럽 여성 문학의 창시자이다.

                         [기타

                         한국과 일본에선 "상드"로 소개되어 이미 일반화되었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외국어 표기법을

                         따른 국식 정확한 표기는 "조르주 상"이다. "드"는 묵음 처리되어 발음하지 않는다.

                         "n"을 제외한 자음으로 마친 프랑스어 고유명사는 마지막 자음을 발음하지 않으며 모음으로

                         시작하는 연음하지 않는다.






출처 : 영주 블로그
글쓴이 : 朴泳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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